<혹성탈출: 새로운 시대>는 앞선 3부작 이후 이야기다. 끝난 줄 알았던 시리즈가 앞선 이야기와 연속성을 버리고 21세기에 리부트 되었다. 사실 이름만으로도 무게감이 느껴지는 <혹성탈출>은 1963년 프랑스의 '피에르 불'의 동명 소설 《유인원의 행성》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총 세 버전이 있다. 1968년 개봉해서 1973년까지 총 다섯 부작으로 이어진다. ‘혹성탈출’ 시리즈(혹성탈출(1968), 지하 도시의 음모(1970), 혹성탈출 제3의 인류(1971), 혹성탈출 노예들의 반란(1972), 혹성탈출 최후의 생존자(1973)와 2001년 ‘팀 버튼’ 감독이 리메이크한 <혹성탈출>이다.
‘루퍼트 와이어트’ 감독의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2011)을 시작으로 트릴로지(3부작) 중 ‘맷 리브스’ 감독의 리부트 버전 <혹성탈출: 반격의 서막>(2014), <혹성탈출: 종의 전쟁>(2017)이 만들어져 부활을 알렸다.인간은 퇴화하고 유인원이 진화한 수 세기 이후를 다룬 21세기 버전의 4편에 해당한다. 혹성탈출 입문자라면 1편인 혹성탈출 68년 버전 이후 <혹성탈출: 새로운 시대>을 보면 좋다. 핵 전쟁으로 인류 문명이 붕괴, 유인원이 인류를 지배하게 된 원인을 확인하며 부제처럼 새로운 시대를 맞이할 수 있다. 시리즈가 많아 부담이 생기겠으나 앞선 이야기를 다 몰라도 괜찮다. 새롭게 쓴 아포칼립스 대서사시는 세계관과 캐릭터에 변화를 주었기에 진입장벽이 높지 않은 편이며 러닝타임 내내 친절히 설명해 준다.
원작의 레거시를 훼손하지 않고 제대로 계승하면서도 VFX 기술의 정점을 확인할 수 있어 극장 관람이 필수인 영화였다. 답을 정해주기보다 질문을 많이 던진다. 빠르게 변하는 시대 속전속결을 원하는 분위기 속 조금 다른 결이다. 명확한 답을 내놓기보다 질문을 던져 관객 스스로 답을 찾길 바라고 있다. 시원하고 명쾌한 정답, 사이다 결말, 신속한 전개가 아니지만 사유의 시간을 내어주는 알찬 영화를 찾는다면 추천한다.
유인원이 지배종 된 아포칼립스
<혹성탈출 : 새로운 시대>는 성공적인 리부트 시리즈의 트릴로지를 마치고 유인원과 인류의 공존을 메시지 삼아 새로운 이야기를 펼친다. 말은 거창하게 했지만 따지고 보면 거창할 것도 없다. 세상을 돌고 돌아 결국 집으로 돌아오는 성장담, 오디세이 영웅서사에 기초하는 까닭이다.자신만의 매와 맺어지기 위해 높은 산에 올라 알을 훔치는 게 가장 위험한 일이었던 노아는 우물 밖을 나온 개구리가 된다. 아무 준비 없이 나온 연약한 아이인 셈이다. 말 못 하는 인간, 말할 수 있는 인간, 시저의 유산을 계승한다는 부족 등을 만나 드넓은 세상을 배워간다. 순수했던 노아는 아버지의 죽음을 통해 각성하고 해체된 부족을 재건해 실질적 리더가 되어간다.
300년 후 인류는 퇴화하고 진화한 유인원이 살아가는 전복된 세상이 왔다. 유인원의 리더 프록시무스(케빈 두런드)는 인간을 사냥하며 제국을 건설하고 있었다. 인간 보다 우수한 유인원이 되기 위해 인간을 해치는 잔인성을 품고 있으며 인간 문명을 가지고 싶어 조바심이 나 있다. 최근 새롭게 발견한 독수리 부족을 공격해 자신의 부족으로 끌고 왔다.그들은 해변가에 세운 제국의 노예로 부리기 좋은 인력이기 때문이다. 한편, 노아(오웬 티그)는 초토화된 부족을 찾아야 할 운명을 맞게 된다. 그 과정에서 시저라는 300년 전 유인원의 전설을 듣고 다른 세상에 눈을 뜬다. 어딘가에 다른 세력이 있다는 것, 최초의 장로이자 품위와 도덕성을 갖춘 리더 시저의 존재, 과거에는 유인원과 인간이 어울려 살았다는 사실로 혼란스러워진다. 생각을 보관하는 고대 방법이라 소개 된 책의 특성이나 말을 하게 된 이유도 학습한다.시저의 가르침을 따르는 라카(피터 마콘)와 노바(사실은 메이)라 불리는 소녀(프레이아 앨런)와 함께 험난한 여정을 시작하게 된다.
종교가 된 시저, 뒤틀린 휴머니즘
수 세기 동안을 거치며 시저는 종교가 되었다. 완벽한 유인원 제국 오아시스를 꿈꾸는 프록시무스는 단기간에 진화하려는 욕망에 사로잡혀있다. 시저가 ‘뭉치면 강하다’, ‘동족을 죽이지 않는다’고 한 시저를 철저히 왜곡한다. 존경받던 시저를 자신과 동일시하며 위상 높은 존재를 꿈꾼다. 이름마저도 ‘프로시마(proxima, 가깝다)’에서 따왔지만 동족까지 공격하는 인면수심이다. 사람에게 쓰는 인면수심이란 단어를 유인원에게 쓰는 이 상황 마저도 혼란스럽다. 유인원의 앞잡이가 된 트레베이선(윌리엄 H. 메이시)은 완벽히 적응해 로마 역사를 가르쳐 준다. 왜 하필이면 로마 역사였을까. 인간을 배척하지만 문명은 배우고 싶었던 프록시무스. 그는 지구의 지배종이 언제라도 바뀐다는 사실을 알고 서둘러 진화하려는 것이다. 결국 로마가 이룬 역사적 위업뿐만 아니라 정복전쟁, 내부 폭정마저도 습득해 독재자의 길을 걷는다. 해안가의 격납고에 보물을 얻기 위해 고군분투하지만 지나친 욕심이 결국 화를 부른다.
인간이란 종(種)의 부끄러움
영화는 유인원을 말과 행동을 통해 인간의 민낯을 드러내자 모욕감이 든다. 인종 우월주의, 식민주의 등 익숙한 이데올로기 속 상하관계 전복이다. 인간보다 더 인간 같은 유인원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니 불쾌함을 넘어 굴욕스럽다. 유인원의 사냥감이 되고, 철장 안 동물원 신세로 전락하고 노역에 이용될 뿐 무가치한 존재가 된 인간은 섬뜩하다. 반면 유인원은 인간 보다 더 인간성을 갖춰 부끄럽기까지 하다.철학적인 질문이 공세 속 휴머니즘을 묻는다. 사회를 이루고 법을 만들며 욕망에 따라 문명을 만들어 온 인간이 모든 것이 파괴된 세상에서 인간성을 잃어버린 설정은 충격적이다. 유인원(독수리 부족)은 인간을 에코라고 부르는데 말을 잘못 옮겨 헤라의 저주를 받고 말을 따라 할 수밖에 없는 정령 에코에서 따온 듯해 의미심장하다. 말로 흥한 자 말로 망하게 된다는 말의 경중을 상징한다.
주인공 노아는 창세기 속 대홍수에 살아남은 인물이다. 프록시무스와 대비되는 전형적인 선한 영웅이다. 노아는 독수리 부족 결속의 날(성년식)에 쓰일 알을 찾는 첫 번째 관문을 통과해야 했다. 어릴 적 친구 수나, 아나야와 어렵게 찾은 둥지의 세 개의 알. 사이좋게 가져가면 되지만 다 하나는 남겨 둔다. 타인을 배려하고, 적당한 선을 지키고, 공동체의 평화를 원하는 이상적인 리더의 자질을 엿볼 수 있다. 이후 험난한 여정에서 온갖 고초를 겪으며 배신, 배려, 결속을 통해 발전해나간다. 노바(메이)와 같은 길을 가는 줄 알았으나 목표가 달랐던 상황을 깨닫고 실망하기도 한다. 인간과의 대립이 아닌 공존을 꿈꿨지만 가족을 잃고 전쟁을 선포하게 된 시저와 노아가 같은 길을 가게 될지 궁금해진다.
앞선 이야기에서 유인원이지만 사람보다도 지능적이고 이타심이 높으며, 뛰어난 리더십을 갖춘 시저를 통해 인간은 수치심을 느낄 수밖에 없다. 연대와 신뢰, 자비를 이루며 살아가는 유인원과 살육으로 서로를 정복하며 싸우다 자멸하는 인류가 과연 만물의 영장일까 의문이 든다. 특히 노바(메이)가 말을 할 줄 아는 다른 인간과 통신 장치로 소통하는 장면과 교차 편집되는 노아의 천체망원경 관찰 장면은 주목할 만하다. 이는 아마도 고전 <혹성탈출>(1968)에서 우주 미아로 떠돌다 지구로 귀환한 비행사와 마주하는 중요한 단서가 될 것으로 보인다. <혹성탈출: 새로운 시작>은 시저의 영웅서사를 끝내고 새로운 영웅 노아를 소개하는 챕터였다. 앞서 말한 대로 고전과 연관되는 다음 이야기를 위한 장치를 열어 두둔 열린 결말이었다. 과연 어떤 이야기로 돌아올까? 후속 편을 기다리는 설렘을 시리즈를 다시 보는 즐거움으로나마 충족해야겠다.
평점: ★★★★★
글: 장혜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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