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일 종로구의 카페에서 <만약에 우리>를 연출한 김도영 감독을 만났다. 영화 <만약에 우리>는 <먼 훗날 우리>(2018)의 리메이크 영화다. 뜨겁게 사랑했던 은호(구교환)와 정원(문가영)이 10년 만에 우연히 재회하며 기억의 흔적을 펼쳐보는 성장 스토리로 <건축학개론>(2012), <너의 결혼식(2018) 이후 오랜만에 선보이는 멜로 영화다.

김도영 감독은 배우 출신 감독으로 오랫동안 연극 무대를 누비다 <82년생 김지영>(2019)로 데뷔했다. 역량을 인정받아 2020년 제25회 춘사영화제 감독상, 제56회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신인감독상을 받았다. <만약에 우리>는 김도영 감독이 내놓은 6년 만의 두 번째 연출작이다. 구교환과 문가영의 출연만으로도 화제를 모았다.

그는 중국뿐만 아닌 한국에서도 많은 사랑을 받았던 원작의 부담감이 어느 정도는 있다고 털어놨다. 하지만 잘 만들어서 본국에서도 사랑받는 영화이길 바란다고 소망했다.

원작 팬이 만든 리메이크


“원작이 넷플릭스에 스트리밍 되자마자 봤다. 팬이 될 정도로 좋아했다. 굳이 좋은 작품을 리메이크 하나 싶어 여러 번 제안이 왔고, 멜로 제안도 의아해 거절했었다. 그러다가 타이밍이 맞았다. (웃음) 그 사이에 준비하던 드라마가 잘 안되기도 했고, 원작이 넷플릭스에 서비스 종료된 시점이기도 했다. (현재는 서비스 중) 모든 상황이 맞아떨어져서 물 흐르듯이 결정했다. 감독은 몇 년에 작품을 한 번씩 하게 되니, 이것도 인연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원작과 끊임없이 비교되는 상황을 감내해야 한다는 숙명도 따른다. 이에 김도영 감독은 원작에서 아버지가 했던 한 문장이 결정적이었다며 한국적 각색의 주안점을 말했다.

“아버지가‘인연이란 게 잘 되면 좋지만 서로를 실망시키지 않는 게 쉽지 않지’라는 문장에 끌렸다. 이 문장을 붙잡고 끝까지 갔다. 두 사람이 만나 사랑하며 작은 균열도 생기면서 꿈을 좇는 과정, 누구나 겪을 수 있는 힘든 시기를 지나 현실의 벽에 부딪히는 보편적인 이야기더라. 원작의 분위기를 잘 살려 우리 정서와 우리 배우로 바꿔 나가자고 생각했다”고 운을 떼었다.

그러면서 원작의 ‘눈’을 ‘비’로 바꿔 다양한 풍경과 설정을 추가하고 싶었다고 전했다. “빗소리, 장마철, 태풍 등 일기가 주는 온도가 뼛속까지 녹아 청춘과 닿겠다고 생각했다. 황순원의 <소나기> 감수성처럼, 비의 내음을 넣었으면 했다. 은호와 정원의 첫 만남과 이별, 재회에도 비가 내린다. 지하철 장면에서 은호가 발을 뺄 때 사운드를 더 넣어 강조했고, 우산에서 떨어지는 빗물, 태풍으로 발이 묶인 상황도 넣어 잔상이 남도록 했다”고 설명했다.

<클래식>(2003)의 ‘너에게 난, 나에게 넌’, <건축학개론>의 ‘기억의 습작’처럼 멜로 장르는 귀에 꽂히는 음악도 사랑받는 공식을 활용해 신경 썼다고 밝혔다. “싸이월드 시대라 유행했던 플레이 리스트를 알아보다가 ‘사랑은 봄비처럼 이별은 겨울비처럼’을 음악감독님의 추천으로 넣었다”며 “좋은 장면은 가져오면서도 핵심을 짚는 게 중요했다. 원작의 감성을 잊지 않기 위해 흑백 연출만큼은 꼭 따르고 싶었다. ‘좋은 이별’은 어떻게 해야 하나를 중심으로 구조를 만들었다”며 차별화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메시지를 놓치지 않고 각색하는 게 필요했다고 말했다.

이어 “후회나 미련보다는 남은 감정을 잘 털어 내는 게 중요했기 때문에 대사를 바꾸면서도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며 고뇌했다. 원작의 대사를 서로 바꿔 말하면 나름의 말맛이 생긴다고 보았다”며 마법의 단어인 ‘만약에’를 제목에 붙이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그래서일까. 결국 ‘집’을 메타포를 설정한 의도와도 맞물리며 한국적 각색에 성공했다. 김도영 감독은 “세 공간의 차이를 두었다. 정원의 방(고시원)은 좁고 빛이 적게 들어온다. 은호의 방(옥탑)은 햇살을 나눠 주는 공간이다. 두 사람의 마지막 방(반지하)은 눅눅하고 축축한 느낌이 강하다. 덥고 습할 때 서로에 대해 알게 되더라. 기꺼이 연인을 향해 선풍기를 놓아주던 그가 머리를 탁 쳐서 자기 쪽으로 돌리는 사소함이 드러난다. 태양, 비, 사고를 통해 둘만의 특별한 관계를 엮어주었다”고 연출 의도를 전했다.

갑자기 궁금해졌다. 영화처럼 옛 연인과 10년 만에 만난다면 어떻게 행동할 것 같냐고 묻자 “옛날에는 헤어진 연인을 저주하느라 바빴지만 이 작품을 만나면서 저도 성장했다. 어떤 관계라도 충분히 애도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배웠다. 다시 만난다면 이제는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당시에는 이별의 압도적 감정 때문에 좋은 감정과 시간까지 엎어버리고 말았다. 비록 엉망진창이었더라고 괜찮았다고 위로해 주며 충분히 슬퍼하는 성숙함이 앞으로 나아가는 데 도움이 된다”고 답했다.

내 영화는 배우가 돋보이는 영화


원작과 가장 큰 차이점은 은호와 정원이 성장캐라는 설정이다. 특히 여성 캐릭터 빌드업은 원작을 뛰어넘는 성취다. 그는 영화를 볼 때 ‘(결말은)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소망에서 시작했다고 말했다. “원작 팬으로서 왜 성공하지 못했는지, 여운과 애절함이 짙게 남았다. 그래서 저는 서로 잘 이별해서 성장했다는 방향으로 틀었다”고 말했다.

이어 “정원이 보육원 출신이지만 씩씩한 사람이길, 힘도 세고 자기 길을 개척해 나가는 친구이길 바랐다. 여러 결핍과 외로움이 더해지면서 돌아갈 집까지 없어져 집을 갈망하는 캐릭터로 변했다. 그래서 어떻게든 독립적으로 행동하려고 노력하고 건축가라는 꿈도 있다”며 “<사랑의 이해>에서 인상적이었던 가영 씨와 막연히 함께하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정원은 배우 자체의 힘이 컸다”고 곱씹었다.

“정원이 버스에서 우는 장면을 찍을 때 ‘뭐든 다 해도 된다’고 말했다. 배우가 자기 에너지를 다 끌어낼 때 짜릿해진다. 가영 씨가 우는데 혼자 있을 때의 얼굴이 완전히 드러나더라. 비로소 배우가 자기를 던져버리는 순간을 발견했다. 얼굴 근육을 자유롭게 쓸 때 엄청난 힘이 전해진다”

실제 두 배우의 나이 차이는 크게 신경 쓸 재료가 되지 않는다고 밝히며 캐스팅 비하인드를 전했다. “교환 씨가 나온 독립영화를 다 봤는데 현실 남친 같았다. 한국말에는 반말과 존댓말의 뉘앙스가 있잖냐. 반말을 썼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세 살 차이 설정했다”며 은호는 배우의 해석에 따른 자기화라고 덧붙였다.

나이 차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내적 이끌림이 케미에서 비롯되었다며 “작가님이 써 놓은 은호와 글을 보고 떠올린 감독의 상상을 지나 배우가 구현한 연기까지. 모두 완벽했다”고 전했다.

김도영 감독은 연기 경력이 지금의 ‘배우 중심’연출에 영향을 끼쳤다고 전하며 차기작 선택도 같은 이유라고 답했다.

“우여곡절 끝에 첫 연출을 해보니, 배우로 있을 때보다 편안함이 느껴졌고 영화를 계속 만들고 싶어졌다. 차기작 <인턴>도 리메이크다. (웃음) 유명한 작품이라 고민과 스트레스가 있지만 그걸 넘어, 꼭 하고 싶은 이유가 있었다. 이런 선택을 하는 건 배우의 존재감이 가장 크다. 그 배우로 채우고 싶다는 확신과 배우의 욕망 때문이다.캐릭터가 배우를 만났을 때 배우가 돋보이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 배우의 해석을 존중해야 하고, 연출은 그걸 다 끌어안아 해석을 맞추어가는 즐거움이다. 연극 무대에 설 때는 나와 관객이 공명하는 그 순간 자체로 존재하기 때문에 결과(연기)를 보지 못해도 짜릿해진다. 배우의 감정은 전염되고 에너지도 전달된다”

마지막으로 20205년 마지막 날 개봉하는 소감을 묻자 <만약에 우리>가 각자의 마음속에 여운이 오래되길 바란다고 희망했다.

“문화나 예술은 나라와 시대와 상관없이 서로의 생각을 읽고 소통할 매개체가 되어준다. 자신의 이야기와 연결해서 받아들이는 지점이 연출자로서 매우 감사하고 기뻤다. 단순히 슬픈 이야기가 아니라, 누군가의 마음을 울릴 수 있는 영화가 <만약에 우리>였으면 좋겠다”